주일설교

2026년 05월17일 주일설교: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작성자 세빛교회 댓글 0건 조회 88회 작성일 26-05-17 23:23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본문 : 창세기 16장 7-14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아브람과 사래, 그리고 하갈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갈을 종종 부정적으로 봅니다.

“사래의 여종이었는데 임신하고 나서 교만해진 사람.”
“정실 부인도 아니면서 고개를 빳빳이 들다가 쫓겨난 사람.”
“자기 자리를 모르고 나섰다가 고생한 사람.”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갈을 그렇게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갈을 멀리서 평가하지 않고, 하갈의 자리로 한 걸음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하갈은 애굽 사람입니다. 사래의 여종입니다.
자기 뜻대로 인생을 선택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일어날 때 아브람은 대략 85세였습니다. 사래는 75세였습니다. 하갈의 나이는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래가 아이를 얻기 위해 하갈을 선택했다면, 하갈은 임신이 가능한 젊은 여성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아무나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곁에서 오래 섬기던, 믿을 만한 몸종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 젊은 여인이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아브람의 집 안에서, 자기 뜻과 상관없이 사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갈은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선택당한 사람입니다.
계획한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 속에 사용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임신을 했습니다.
그 순간 하갈의 마음이 조금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이제 내 처지가 조금 나아지겠구나.”
“이제 나도 이 집에서 완전히 무시당하지는 않겠구나.”
“내 뱃속에 아브람의 아이가 있으니, 나도 사람답게 대접받을 수 있겠구나.”

성도 여러분, 이것이 그렇게 악한 마음입니까?

종으로 살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존재가 인정받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것입니다. 늘 시키는 대로만 살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인생에도 숨통이 트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하갈에게도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하갈이 사래를 가볍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하갈 안에도 교만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갈은 죄 없는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갑자기 자기 처지가 달라졌다고 느꼈을 때, 그 마음이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갈이 그렇게 학대받아야 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임신한 여인이 광야로 도망갈 만큼 몰려야 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그를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습니까?

하갈은 억울했을 것입니다.

“내가 원해서 이 집에 온 것도 아닌데.”
“내가 원해서 아브람에게 간 것도 아닌데.”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왜 모든 고통은 내가 받아야 합니까?”

바로 그 억울함이 하갈을 광야로 밀어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닌데 책임은 내가 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버텼을 뿐인데, 어느 순간 비난은 나에게 쏟아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결정 때문에 내가 상처를 입었는데, 사람들은 내 사정은 묻지 않고 내 반응만 문제 삼을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예민해?”
“너도 잘한 건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더 참았어야지.”

맞습니다. 우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갈도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이 집 안에는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사래는 자기 상처 속에서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아브람은 책임져야 할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하갈도 자기 처지가 달라졌을 때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모두가 깨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결국 하갈은 도망합니다.

임신한 여인이 광야로 도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광야는 뜨겁고, 메마르고, 물이 없고, 길을 잃기 쉬운 곳입니다.

하갈은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우물가까지 갑니다. 그 길은 약 160km에 이르는 먼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 것은 거리만이 아니었습니다. 하갈의 마음이 그만큼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구나.”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는구나.”
“나는 없어져도 되는 사람인가 보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이 하갈을 찾아오십니다.

창세기 16장 7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하갈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갈이 특별한 기도를 드렸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갈을 찾아오셨습니다.

사람들은 하갈을 놓쳤습니다.
사래는 하갈을 품지 못했습니다.
아브람은 하갈을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갈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물으십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이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출발도, 도망도, 상처도 아십니다.

그런데도 물으십니다.

“하갈아, 네 이야기를 해 보아라.”
“어디가 그렇게 아팠느냐?”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이 질문은 정죄의 질문이 아닙니다.
하갈을 다시 사람으로 세우시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하갈을 도구처럼 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을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하갈아.”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십니다.
그의 처지를 아십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십니다.

하갈이 대답합니다.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짧은 대답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들어 있습니까?

“저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대답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 저는 도망치고 싶습니다.”
“제 마음이 너무 지쳤습니다.”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도망치는 사람을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찾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이 내 광야로 오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잡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을 찾아오셨을 뿐 아니라,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하나님은 하갈에게 아들의 이름을 알려 주십니다.

이스마엘.

그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입니다.

아무도 하갈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괜찮니?”
“무슨 일이 있었니?”
“얼마나 힘들었니?”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고통을 들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듣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가족도 듣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끝까지 말하지 못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억울하다고 말하면 더 초라해질까 봐 입을 다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한숨도 들으십니다.
눈물도 들으십니다.
말하지 못한 침묵도 들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갈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성도 여러분, 이 축복은 원래 누구에게 하신 것입니까?

아브람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자손을 많게 하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 그것은 아브람이 받은 약속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하갈에게도 그 약속의 언어를 주십니다.

하갈의 주인이 받은 그 약속을, 지금 하갈 자기에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갈은 누구입니까?
아브람 집의 중심 인물이 아닙니다.
사래가 인정해 준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도망친 여종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하갈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내 약속 밖에 있지 않다.”
“나는 네 고통만 들은 것이 아니라, 네 미래도 붙들고 있다.”
“네가 안고 있는 생명도 내가 보고 있다.”

이것이 하갈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하갈의 상황을 당장 바꾸지는 않으십니다.
사래를 없애 주시지도 않습니다.
아브람을 당장 찾아와 사과하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갈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러분, 이 말씀이 쉬운 말씀입니까?

핍박받고 도망 나온 그곳으로 다시 가라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자리로 다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다시 마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황을 변화시키셨습니까?

아니오.
그 상황을 맞닥뜨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약속으로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상황이 바뀌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믿음은 상황은 그대로인데,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문제가 사라져서 담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셨다는 사실 때문에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인정해서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약속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갈은 하나님께 이름을 붙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은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엘 로이.

하갈은 평생 누군가의 시선 아래 살았습니다.
주인의 시선, 여주인의 시선, 사람들의 평가, 신분의 눈초리 아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갈은 다른 시선을 알게 됩니다.

이용하는 시선이 아닙니다.
무시하는 시선이 아닙니다.
정죄하는 시선이 아닙니다.

살피시는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살핀다는 것은 돌본다는 뜻입니다.
관심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광야와 눈물을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광야와 눈물도 살피십니다.

하갈의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수치와 외로움과 버림받음의 광야로 친히 들어오셨습니다. 사람들이 피하는 사람을 찾아가셨고, 사람들이 듣지 않는 울음을 들으셨고, 사람들이 멀리한 자리에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하갈은 광야에서 버림받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실제로 버림받은 자의 자리로 들어가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버림받은 사람의 울음을 아십니다.
외면당한 사람의 침묵을 아십니다.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의 두려움을 아십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수치와 도망을 담당하셨습니다.
사래처럼 상처를 핑계로 누군가를 아프게 한 죄도 담당하셨습니다.
아브람처럼 책임져야 할 사람을 외면한 죄도 담당하셨습니다.
하갈처럼 절망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의 연약함도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무엇이 끝났습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밖에 없던 우리의 죄가 끝났습니다.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거짓말이 끝났습니다.

부활로 무엇이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께 발견된 사람의 새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야가 무덤이 아니라 은혜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통로가 되는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갈은 약속 때문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큰 약속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멀리서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오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부활은 광야가 마지막이 아니며, 버림받음이 우리의 결론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도는 상황이 다 바뀌지 않아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광야까지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보았다.”
“나는 네 고통을 들었다.”
“너는 버려진 사람이 아니다.”
“너는 나에게 발견된 사람이다.”

이 은혜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가는 통로로 세우십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마음으로 광야를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아무와도 깊이 연결되지 못한 성도, 가정 문제로 무너지고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사람, 복음을 들어야 하지만 교회 문턱 앞에서 망설이는 이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안부, 진심 어린 질문, 조용히 들어주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브엘라해로이, 곧 생명의 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통로는 될 수 있습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찾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들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살피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질문입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상처에서 왔느냐?
억울함에서 왔느냐?
외로움에서 왔느냐?

그리고 너는 어디로 가느냐?

도망으로 가느냐?
방관으로 가느냐?
아니면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누군가를 찾아가는 길로 가느냐?

하갈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 그곳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가 누군가에게 그런 우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정이 누군가에게 그런 우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작은 관심이 누군가에게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는구나” 하는 은혜의 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 자신이 하갈처럼 광야에 앉아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고통을 들으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광야까지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버려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발견된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서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판단만 하고 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찾아가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복음의 사랑으로 다시 품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하갈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보내십니다.

“나는 너를 보았다.
나는 네 고통을 들었다.
이제 너도 나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라.”

그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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